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오동 전투 (문단 편집) === 봉오동 전투 === 6월 22일 상하이 '독립신문'에 따르면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 전과가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 국무원이 통신을 받고 공포한 '호외'에 근거해서 "적 120명을 섬멸하였다"고 보도했다. 6월 24일 독립신문에서는 "적의 사자 60, 부상자 50이고 아군은 부상자 2명"이며 "촌민의 사상자는 9명"이라고 보도했다.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의 '호외'에서는 "적 전진부대 150명을 섬멸하고 아군 사망자는 근근이 3명"이라고 보도했다. 6월 13일 간도국민회 제2지방회의 '공보'에서는 "1.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기 1명. 병졸 49명이 즉사."라고 보도했다. 일각에선 이런 보도들이 모두 오보거나 과장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연변대 역사학 교수 박창욱 선생의 논문을 인용한다. >『제2북부 지방회의 통보에서 대대장 1명이 죽었다는 것은 오보이다. >대대장이라면 안천(야스카와 - 글쓴이) 소좌를 말하는데 안천은 그 후 돌아가서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 거기다 같은 해 10월 21일 청산리 전역('청산리 전투'-글쓴이)에서는 백운평 전투에서 선봉 추격대 90명을 거느리고 직소에서 북로군정서의 교성대와 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안천 소좌가 거느린 1개 대대 병력이 참가하였다고 나오는데 과장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평시 편제에 근거하면 보병 1개 대대는 600~700명의 병력이다. 이런 과정으로 하여 전과에서도 "120명 또는 150명을 섬멸"하였다고 하는데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117] 100명을 사살했다는 건 물론 사상자가 그 정도라는 잘못된 정보를 참으로 알고 썼거나 사기 고취를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린 선전이다. 또 강룡권 교수가 현지 답사를 하고 현지인들의 증언을 들었는데 이에 따르면 일본군이 패배해서 독립군이 추격한 형태가 아니라 독립군은 적극적으로 기습한 후 적극적으로 후퇴한 형태였다. 일본군이 학살을 벌인 이유는 독립군을 사살하지 못한 패배 때문이라고 하며 본인들이 독립군에게 사살당한 탓이라는 증언이 없다. 일본군에게서 대량 사상자가 나온 이유에 독립군의 사살은 언급되지 않으며 일본군 내부끼리 오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 봉오동 전투는 점심 때쯤부터 시작되었다. 보리 저격 때가 되여 쾌청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와 소낙비와 우박을 억수같이 퍼부으니 삿갓에 구멍이 난 것은 물론 머리 위에 이고 있던 함지도 깨질 정도였다. 소나기가 내리면서부터 총소리가 멎고 싸움이 끝이 났다. 일본군들은 호박골로 퇴각하면서 __조선 풍리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오던 지원병과 피파골에서 저들끼리의 싸움이 붙었다.__ > > 최상준의 증언-도문시 오공촌 > (...)전투 당시 애기 주먹만 한 우박이 쏠아져[* 쏟아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메터 앞도[* 1m 앞 혹은 "한 치 앞도" 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이지 않으니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싸움을 끝내고 보니 독립군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땅에 풀썩 주저앉으며 "독립군들이 안개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어두워서야 호박골로 후퇴하던 __일본군은 피파골에서 오는 자기 쪽 지원군들과 오해로 말미암아 전투가 있었다.__ > > 리종만의 증언 - 도문지 홍광향 홍위촌(곡수) > 경신년에 나는 13살이었는데 관개지 땅에서 농사지었다. 일본 토벌군은 하전자에서 5호 동네를 거쳐 남봉오골 마을엔 들리지 않고 고개 하나 넘어서 마촌에 당도했다. 그때 우리 집은 마촌에 있었는데 전날에 벌써 피란 가고 마도윤 로인 혼자만 남아있었다. 일본군은 마촌에서 아침을 지어 먹은 후 마도윤 로인을 협박하여 서수레에 경기관총 2정을 싣고 봉오동으로 갔다. 첫 총소리에 말탄 일본 군관이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 싸움을 몇 시간 하다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폭우가 쏟아지며 우박까지 퍼붓는 통에 어느 편도 총을 쏠 수가 없었다.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천지신명이 독립군을 도와주었다. 소낙비가 그치자 독립군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일본군은 손실을 입고 호박골로 후퇴하면서 산중에 피란 갔던 백성들에게 분풀이를 하며 18명이나 참살했다. 이와 같이 백성을 마구 죽이던 놈들이 얼마 못 가서 '''저들끼리 싸워 떼죽음을 당했다'''. 그것을 봉오동에서 전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하러 오던 __일본군과 피파골로 후퇴하던 일본군이 서로 마주치자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알고 격렬한 싸움__을 벌인 것이다. __싸움에서 큰 손해를 본 일본군__은 두만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용배미(훈춘시 량수진[* 양수진] 경영촌)에 천막을 치고 3일이나 묵어있다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배를 타고 돌아갔다. > > 그 외에도 안산의 김동진(1986년에 72세), 남봉오동의 한동선(1986년도에 75세), 김리환(1986년에 75세)등 로호들을[* 노호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방문했는데 그들 모두는 폭우가 전투를 종결지었다고들 했다. > > 이처럼 실제 조사 자료를 종합해 보면 봉오동 전투는 '''일제의 퇴각과 독립군의 추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립군의 주동적인 매복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독립군의 주동적인 후퇴로 끝난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4~266 [* 강용권 연구원은 당시 중국 옌볜(延邊)역사연구소 연구원이었다.[[https://news.joins.com/article/3500839|#]]] 위의 일본군끼리의 [[팀킬]]은 피파골 전투라고 부른다. 일본군 간의 오인 전투는 위의 두 명 말고도 여러 명이 증언하는데 강룡권 연구원은 "1986년 7월 6일 연변력사연구소의 리룡화 선생과 함께 경영촌을 방문"해서 "유민섭(72), 리성발(71), 리복녀(84) 등 로인들을 찾아 피파골 싸움에 대한 진위를 물었더니 __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__."고 한다.[* 강룡권,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연변인민출판사, 266] 피파골 전투까지 감안하면 알 수 있는 점은 교과서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군 전사자 150명 선은 허구일 수도 있다.''' 일본군 사망자 = 독립군이 사살한 일본군이 아니다. 십수 명선으로 정리되는 일본군 사상자의 대부분이 아군 오사로 발생했다는 증언까지 있다. 일본군 사망자 중 어디부터 독립군이 사살이고 어디부터 일본군끼리의 오사로 인한 사고인지 불분명하며 그 숫자도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세윤 고구려 연구재단 연구위원은 2005년 기사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의견을 남겼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322980|기사]] 기사에서 장세윤은 일본군 자료는 자신들의 피해를 너무 축소해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며 여러 자료를 감안할 때 봉오동 전투에선 일본군 100여 명이 살상됐고 청산리 전투에선 일본군 400∼500명 살상, 독립군도 그에 못지 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 수치도 일본측의 주장과는 확연히 동떨어지는 숫자기 때문에 장세윤이 어떤 근거로 봉오동에선 100명 사상, 청산리에선 4~500명 사상이라는 주장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청산리 전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효승은 청산리에서 수백명 사상이라는 사상자 수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남겼다.] 일본 측에서 정리한 당대의 야스가와 소좌 보고서인 <봉오동부근전투상보> 간도 일본 총영사 대리 사카이 요사키치의 보고서, 간도 일본영사분관 와쿠이 복명서 등 일본 측에서의 정리한 자료는 일본군의 전사자는 1명 부상은 2명에서 10명 선이다.[[https://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4188|#]][* 영화 봉오동 전투가 개봉됐을 때 실제 고증과는 맞지 않다는 반론이 많이 나왔고고 우익 계열 언론인 미디어워치에서 이를 종합해 보도한 바 있다. 언론이 다소 편향적이긴 하지만 일본측의 자료를 보는 기사 정도로 참고하자.] 또 일본군의 전사자 영령을 합사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봉오동 전투 희생자는 아예 없다. 청산리 전투도 11명 죽었다고 합사했는데 설령 일본군이 희생자 수치를 줄였다고 해도 150명이 죽었다면 적어도 수십 명 혹은 수 명은 합사해야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합사자가 아예 없다는 건 희생자 수치에 대해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거 일제의 역사적으로 불리한 기록에 대해 축소하거나 왜곡한 사례를 감안한다면 이 역시 조작 및 왜곡되었음을 의심해 볼 여지는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문제는 후생성 명부에 등록되어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는 하지만 봉오동 전투에서의 합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역시 조작이 참으로 의문시된다.] 이상훈 육사 교수 같은 경우 많이 인용되는 야스가와 소좌의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대해 가필이나 수정 흔적이 있다며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했다.[[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10273810Y|#]] 이 교수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일본군 보병대 중심의 추격대 상황만 기록돼 있을 뿐이어서 경찰과 민간인이 다수 소속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토벌대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며 "봉오동전투 당시 두만강 하류 일대에 500명을 초과하는 일본군이 집결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독립군 전과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상훈 교수도 일본군이 정확히 몇 명 죽었는지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으며 이어 독립군 측 전과 기록에 대한 검토와 봉오동 전투 전개 과정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 측과 일본 측의 사상자 부분은 기록의 크나큰 상이성으로 인해 많은 의문이 남아 있으며 아직 명확한 수치는 불명이다. 한국 측의 독립신문 88호 호외 부분이나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가 쓴 <진정서> 같은 회고록 등은 일본군의 피해가 다대하다고 기술했지만 이 사료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는 시각은 많다. 또 [[홍범도]]가 쓴 <홍범도 일지>에서는 일본군 370명이 전사했고 후원병 100명이 존재하여 결과적으로 5~600명이 죽었다고 기술했다. 일반적으로 홍범도 일지는 과장으로 보지만 장세윤 같은 경우 출동한 일본군 숫자와 비슷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신빙성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즉 이와 같은 회고는 숫자 그 자체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승전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강조하고 싶어하는 심정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상훈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 24페이지] 그렇다고 한국 측 자료만 이상한 게 아니고 이상훈 교수는 일본측의 야스가와 소좌 보고서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한 바 있으니 한일 양측의 자료가 정확히 연구되어 [[교차검증]]을 통해 앞으로 봉오동 전투의 전과 부분에 있어 명확한 연구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본문단을 쭉 읽어 보면 알겠지만 한국측 자료라는 것이 대부분 카더라에 의존한 기사나 추측성 증언인 반면 일본측은 공문서를 근거로 하고 있고 추격을 피하는 입장인 독립군측이 전장을 수습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하간 청산리 전역을 연구한 기고에서 신효승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항일 독립운동에서 그 실상과 의의를 생각하지 않고 <전과> 부분에 집착하는 것은 항일 독립운동사를 명확하게 보는 관점은 아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0325170?sid=103|#]]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김학철(1916)|김학철]] 선생 역시 봉오동-청산리 전투 당시 독립군의 전과나 자신이 활동한 조선의용군의 혁혁한 전과보다는 "윷진아비마냥 일본군이 쓰러질 때까지 달려든" 불굴의 정신을 강조하며 비슷한 말을 남긴 바 있다.[[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0106271914311|#]] 즉 그 본질은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부분을 억지로 강조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키우는 데만 열중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열세의 전력에서도 용맹히 항거한 독립군의 전과가 형편없다고 굳이 깎아내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설령 전과 부분에서 명확한 대첩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우세해도 독립군의 게릴라 수준의 장비와 병력, 보급, 훈련도의 여러모로 열세한 상황에서 일본 제국 정규군과 한바탕 싸운 그 정신과 의의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봉오동-청산리 전역과 여러 전투를 전과 부분에 매몰되지 말고 그 자체의 의의를 보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